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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녹우당문화예술재단

녹우당 인물들

낙서 윤덕희

 

윤덕희필 연옹화첩_군선경수도_0.jpg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이자 화가이다. 자는 경백(敬伯)이며, 호는 낙서(駱西) · 연옹(蓮翁) · 연포(蓮逋) · 현옹(玄翁)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1685년 6월 11일에 태어나 1766년 12월 13일에 82세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해남군 화산면 관선불에 있다.

 
고조부 윤선도(尹善道)는 문인이자 정치가로, 1659년 기해예송(己亥禮訟)에 참여한 남인(南人)의 거두(巨頭)였다. 부친은 윤두서(尹斗緖)이고, 모친은 이수광(李睟光)의 증손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윤두서는 숙종대에 활약한 문인화가로 조선 중기를 마감하고 후기의 시발점인 1700년 무렵에 중기의 화풍을 대체할 조선 후기 새로운 화풍을 견지했던 위대한 업적을 남긴 거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9남3녀 중 장남인 윤덕희는 부친의 화업을 이어받아 다시 둘째 아들 윤용(尹愹)에게로 전해주어 3대에 걸쳐 문인화가로 일가를 이루는 데 가교 역할을 했다. 18세기 대표적인 시인 신광수(申光洙)는 매제이다.
 
1694년 갑술환국을 끝으로 남인이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서인들이 정치권의 주도세력이 됨에 따라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선대(先代)부터 이어온 넉넉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평생 동안 학문과 시 · 서 · 화에 몰두하였다.
 
윤덕희의 생애는 초년기 · 중년기 · 노년기 · 만년기 4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출생부터 29세 때인 1713년에 해당되는 초년기에는 서울에서 살면서 20세 이전에 이서(李漵)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부친 윤두서의 영향으로 24세(1708)경부터 서화에 입문하였다.
 
29세(1713)부터 47세(1731)에 해당되는 중년기에는 해남에 살면서 가전유물(家傳遺物)을 정리했으며, 틈틈이 서화를 수련하였다.
 
35세(1719)에 해남(海南) 백련동(白蓮洞)에서 선친 윤두서의 그림을 모아 《가전보회(家傳寶繪)》와 《윤씨가보(尹氏家寶)》 등 화첩 두 권을 만들었다. 47세(1731)부터 68세(1752)에 해당되는 노년기에 서울로 이주하여 살면서 가장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였다.
 
63세(1747)되는 해 3월 22일부터 4월 27일까지 총 35일 동안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煊)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탐승하고 금강산기행문인 『금강유상록(金剛遊賞錄)』을 남겼다.
 
이 책에는 <장안사산영루망금강산도>와 <정양사헐성루망금강산도>를 사생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윤덕희도 금강산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64세(1748) 1월 19일에는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된 숙종 어진 이모(移摸)에 조영석 ·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감동(監董)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그 해에 사포서별제, 이듬해인 1749년에는 종6품직인 사옹원주부를 거쳐 왕릉을 관리하는 직책인 정릉령(貞陵令)을 제수 받았으나, 그 해 겨울에 병으로 사임함으로써 2년 여 동안의 짧은 관직생활을 마감하였다.
 
68세(1752)부터 82세(1766)에 해당되는 만년기에는 해남으로 낙향하였으며, 왼쪽 눈의 실명으로 인해 작품 활동에는 주력하지 못하고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윤덕희의 사상과 학문은 성리학 · 불교 · 도가 및 신선사상 · 양생술(養生術) · 의약 · 음악 · 중국소설 등에 두루 미쳤다. 또한 독서하는 127종의 중국소설 목록은 『수발집』 초본 중 하나인 『사집(私集)』 권4에 수록되어 있다.
 
왕가(王家)의 종신(宗臣) 남원군(南原君) 이설(李) ·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煊) · 순제군(順悌君) 이달(李炟) 등은 1731년 이후 교유했던 시 · 서 · 화 동호인들이다.
 
또 근기남인(近畿南人) 서화그룹에 속한 윤덕희는 당색에 연연하지 않고 이병연 · 정선 등 노론계 인사들과도 부분적으로 문예교류를 하였다.
 
25세(1709) 때 사촌 윤덕부(尹德溥)에게 그려준 부채 그림에 대해 차운한 시에서 "그림은 진상(眞像)을 본뜨는 것이니, 선명하기가 진경(眞景)을 대하는 것 같아야 하는데[畵乃倣眞像 宣如對眞景尹德熙]."라고 한 바와 같이 '그림이란 실재의 형상(眞像)을 본뜨는 것이니 실재의 경치(眞景)를 대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야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유고로는 『수발집(溲勃集)』(필사본 상 · 하권)과 『금강유상록(金剛遊賞錄)』(필사본) 등이 해남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유존작은 전칭작을 포함해서 대략 115 점이며, 윤두서의 영향을 받아 남종문인화 · 진경산수화 · 풍속화 · 도석인물화 · 말 그림 등 다양한 화목(畵目)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말 그림과 신선 그림으로 화명(畵名)을 떨쳤다.
 
심재(沈)는 『송천필담(松泉筆談)』에서 "조선 중엽 이전에 명수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그림은 졸렬하고 메마르고 거칠고 엉성했는데, 비로소 공재 윤두서로부터 차츰 길이 열렸고, 연옹이 그 뒤를 이어서 신선과 말을 그렸으니 세상에서 쌍절(雙絶)이라고 일컫지만 필법이 나약하였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진휘속고(震彙續考)』에 의하면 "글씨와 그림에 능했고, 특히 말 그림과 신선 그림을 더욱 잘 그렸다[善書畵 尤善畵馬畵仙]"고 한다. 황윤석(黃胤錫)은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 "윤덕희는 승(僧)과 말 그림을 잘 한다"고 평하였다.
 
이규상(李奎象)의 『일몽고(日夢稿)』에는 "윤두서와 윤덕희는 말 그림으로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낙서의 말이 모두 그 묘를 떨쳤다" 고 하였다.
 
駱西恭齋子德熙之馬 皆極其妙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第)1집 「가장화첩(家藏畵帖)」
 
산수화는 주로 이상경이나 탈속을 소재로 한 정형산수화(定型山水畵)를 주로 많이 남겼다. 조선 초 · 중기 화풍 및 남종화법(南宗畵法)을 추구하면서 점차 음영법을 사용하여 대상의 입체감을 살리는 데 비중을 둔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해 내었다.
 
초기(1708~1731년 경)에는 일찍이 남종화법을 습득해가는 수련과정을 볼 수 있다. 중기(1731년경~1739년경)에는 조선 초 · 중기 안견파(安堅派) 및 절파화풍(浙派畵風) 등 전통화풍의 계승 및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익히는 데 몰두하였다.
 
특히 미법산수(米法山水), 원말(元末) 사대가(四大家)의 화풍, 명대(明代) 오파화풍(吳派畵風), 청대(淸代) 안휘파화풍(安徽派畵風) 등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47세(1731) 때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는 안견파화풍과 남종화풍의 절충양식을 취한 예이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산수도>는 『고씨화보』의 '황공망산수도'를 임모하면서 나름대로 변형을 가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도>에서 보이는 방형 또는 단순한 각진 형체들의 반복으로 구축된 산세는 이전의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는 유형으로 명말청초 안휘파 화가인 소운종(蕭雲從)의 『태평산수도(太平山水圖)』(1648)의 산석법과 유사하다.
 
후기(1739년경~1766년)에는 서양화법을 수용하고, 거기에 윤두서로부터 배운 전통화풍을 가미하여 독자적이고 개성있는 화풍을 형성하였다.
 
후기에는 자신의 심회를 반영한 탈속을 소재로 한 <관수도(觀水圖)>, <관월도(觀月圖)> 등 산수인물도를 주로 그렸고, 더욱 원숙해진 남종산수화를 제작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하관수도(樹下觀水圖)>는 산수인물도에서도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예이다.
 
윤덕희는 진경산수화도 남겼는데, 기록에 의하면 1747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금강산 그림을 그린 바 있다. 현재 전하는 진경산수화는 1763년에 그린 <도담절경도(島潭絶景圖)>가 유일한 예이다.
 
인물화에서는 도석인물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팔선(八仙) · 호계삼소(虎溪三笑) · 수노인(壽老人) · 유해섬(劉海蟾) 등 흔히 알려진 소재에서부터 진무(眞武)와 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신선들까지 화제로 다루어 신선 그림의 도상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도석인물화에서도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였으며, 『삼재도회(三才圖會)』를 통해서 다양한 신선 도상의 소재를 활용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도석인물화는 팔선을 비롯한 여러 신선들이 군집해 있는 군선도 형식으로 그린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이다. 신선의 도상적 특징으로 보아 앞줄 윗쪽부터 이철괴(李鐵拐) · 조국구(曹國舅) · 동방삭(東方朔)이 일렬로 서 있다.
 
뒷줄 윗쪽부터 차례로 종리권(鍾離權) · 여동빈(呂洞賓), 그 뒤에 약간 비켜 서 있는 유자선(柳子仙)이 보인다. 등장하는 신선들 중 조국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삼재도회』의 각 신선도상을 차용하였다.
 
서양화법을 활용한 후기 신선 그림의 대표적인 예는 간송미술관 소장 <남극노인도(南極老人圖)>(55세작)로, 청주목사를 지냈던 최창억(崔昌億)의 회갑일인 1739년 12월 22일에 축수용으로 그려준 것이다.
 
풍속화는 현실적인 풍속을 그린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윤두서의 그림이나 화보에서 일부 혹은 전체를 차용하여 조선풍으로 번안을 시도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기놀이>,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여인독서도(女人讀書圖)>,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오누이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동물화로는 <인마도(人馬圖)>, <수하마도(樹下馬圖)>, <용도(龍圖)> 등을 그렸다. 윤두서로부터 가전된 말 그림을 계승하면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화풍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말 그림에서는 윤두서 화풍의 영향으로 북송대 이공린(李公麟)과 원대 조맹부(趙孟頫)의 고전적인 화풍을 추구하면서도 인물과 말에 음영법을 구사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마상부인도(馬上婦人圖)>와 일본 유현재(幽玄齋) 소장 <마정상도(馬丁像圖)>는 인마도 계열로 1736년 여름에 둘째 아들 윤용에게 그려 주었던 작품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어자조마도(馭者調馬圖)>는 말과 마부에 음영을 가한 흔적이 뚜렷하며, 말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적인 동작은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사실감이 넘쳐 득의작으로 평가된다.
 
글 차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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