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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녹우당문화예술재단

청고 윤용

청고 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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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이자 화가이다. 자는 군열(君悅), 호는 청고(靑皐) · 유헌(萸軒) · 소선(簫仙)이며,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1708년 7월 27일에 출생하여 1740년 3월 8일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해남군 현산면 공소동에 있었으나 현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윤두서(尹斗緖)의 손자이며 윤덕희(尹德熙)의 둘째 아들이다. 부인 성산 이씨 사이에서 외동딸을 두었다. 사망한 후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아우 윤굉(尹 ) 의 둘째 아들 윤지흥(尹持興)이 입계되었다.
 
윤두서와 윤덕희로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이어받아 가법(家法)에 따르는 그림을 남겨 해남윤씨(海南尹氏)는 조선 후기 3대에 걸친 문인서화가를 배출한 가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5형제 중 유일하게 28세(1735)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형 윤종(尹悰)과 동생 윤탁(尹)이 쓴 윤용의 제문(祭文)에 의하면 윤용은 시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시어(詩語)는 표일(飄逸)하고 가벼운 아취가 있고 속진의 기운이 적고 선적(仙的)인 것이 많았다고 한다.
 
고모부인 신광수(申光洙)는 윤용의 그림에 대해 "우연히 붓을 놀리면 역시 하늘이 낳은 재주라 안개와 구름싸인 풀과 나무 · 화조 · 충어 · 춘하추동 · 깊고 엷고 쓸쓸하고 여유 있는 것들이 모여서 만 가지 변화를 이루어 신묘한 경지를 다하고 허공에 들어갔다."고 평하였다.
 
偶然揮洒 亦自天縱 烟雲草樹 花鳥虫魚 春夏秋冬 濃淡慘舒 回薄萬變 窮神入虛申光洙
 
『석북집(石北集)』 권(卷)14, 「祭尹君悅愹文」
 
18세기 조선인물지인 이규상(李奎象)의 『일몽고(一夢稿)』 중 「화주록(畵廚錄)」에는 "윤용은 젊은 시절부터 과시(科詩)로 명성을 날렸는데, 경발한 시어가 매우 많았다. 산수를 잘 그렸으나 요절하였다"라고 평할만큼 당대에도 시화(詩畵)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당시 25세(1732)의 윤용을 두고 "재주가 빼어나 앞으로 나아감을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다만 그 성공이 어떠할까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인계(西人系) 문사였던 조귀명은 윤용이 중국을 사모하여 중국 그림을 모방한 점을 비판하였다. 강세황의 처남인 유경종(柳慶種)은 윤용이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화훼 · 초충 · 화조 · 미녀 등을 잘 그렸다고 평하였다.
 
몇 권의 유고(遺稿)와 완산악부(完山樂府) 및 의장19승(義庄十九勝)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완산악부와 의장19승 등의 악부시(樂府詩)는 천기(天機)가 저절로 울리고 장려한 기운과 조용하고 맑은 아취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가장(家藏)된 《취우첩(翠羽帖)》 역시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에 해남 외갓집을 방문하여 외숙인 윤용이 그린 이 화첩을 보고 발문(跋文)을 썼다.
 
발문에 의하면 이 화첩은 4권이고 '취우첩'은 군열이 스스로 자기 그림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물총새[翡翠]가 스스로 제 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이 화첩에 대해 "꽃과 나무 · 영모 · 벌레 등은 모두가 핍진한데 그 묘리는 정밀하고 섬세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 윤공은 일찍이 나비와 잠자리를 잡아다가 그 수염과 분가루 같은 미세한 것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여 그 형태를 묘사해서 기어이 실물과 똑같이 그린 후에야 붓을 놓았다."고 하였다.
 
所作花木翎毛蟲豸之屬 皆逼臻 其妙森細活動 … 尹公嘗取蛺蝶蜻蛉之屬 細視其鬚毛粉澤之微 而描其形 期於肖而後已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第)1집(集) 시문집(詩文集) 14권(卷), 「발취우첩(跋翠羽帖)」
 
이를 통해 윤두서로부터 가법으로 이어온 관찰과 사생을 중시하는 사실주의적 회화관을 엿볼 수 있다.
 
윤두서와 같이 화가로서 대성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음에도 요절하였을 뿐 아니라 여가가 있을 때만 가끔 그려 현존하는 작품은 불과 20점 안팎에 불과하다.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산수화 · 풍속화 · 도석인물화 · 초충 · 화조화 등에 두루 재능을 보였다.
 
현전하는 작품은 산수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수각청천도(水閣聽泉圖)>, <송암청문도(松菴淸問圖)>, <고사관폭도>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증산심청도(蒸山深靑圖)>와 <산수도>, 고(故) 유복렬 소장 <연강우색도(煙江雨色圖)>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점경인물을 산수 속에 배치하는 산수인물도 형식을 따른 점, 화보를 통해 익힌 수지법(樹枝法)을 다양하게 구사한 점 등은 가전된 화풍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윤용은 가전된 화풍을 수용하면서도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절파화풍(浙派畵風)에서 탈피하여 사의성(寫意性)이 강한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추구한 면이 뚜렷하다.
 
윤용의 작품들은 그림 위에 제시(題詩)를 쓰거나 시화합벽첩(詩畵合璧帖)으로 제작하여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의 경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풍속화인 <협롱채춘도(挾籠採春圖)>는 망태기를 옆에 끼고 호미를 들고 봄나물을 캐러가는 시골 아낙네가 허공을 응시하고 서 있는 뒷모습을 포착하였다.
 
비록 소재는 윤두서의 <채애도(採艾圖)>에서 차용하였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풍속화에서 한걸음 더 진전된 면모를 보여준다.
 
신선도로는 현재 서강대학교박물관 소장 <종리권도(鍾離權圖)>가 전한다.
 
윤용의 사실적인 회화 태도를 엿볼 수 있는 화훼 · 초충 · 화조 그림들은 현재 남아 있는 예가 없다. 다만 <송암청문도>에 보이는 학 그림은 화조화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집필자 차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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