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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녹우당문화예술재단

고산 작품 및 자료

고산 윤선도 묘소

조회 수 2626 추천 수 0 2023.03.11 16: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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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참의 윤선도는 호가 고산인데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이라고 부른다. 감여의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이 있었다."라고 극찬했던 고산공이 생전에 점지해놓은 자신의 묘소자리이다.

 

고산공이 지은 금쇄동기에 보면 이 묫자리를 발견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있는데

"국고대 아래 서북쪽에 깊은 계곡이 있으니 바로 옥녀동(玉女洞)이다. 내가 지난해 여름에 이곳을 얻었는데 기이한 형상이 있다."

국고대에서 바라보면 서북쪽 계곡 능선에 묘소가 바라보인다.

 

옥녀(玉女)는 풍수지리 형국론에 나오는 용어인데 

"옥녀(玉女)는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으로서 도교에도 자주 등장하여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고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런 형국이 있는 양택이나 음택에서는 만인이 부러워하는 인물이나 재자가인(才子佳人)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이 금쇄동기를 지은 시기가 55세 되던 1641년(신사)년 겨울에 지었으니 이곳을 발견한 것은 지난해 여름인 54세 되던 1640(경진)년 여름으로 추정된다.

 

고산공은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양한 지식을 가졌는데 젊었을때에는 교하천도론을 주장한 명풍수사인 이의신(李懿信)과도 어울리며 많은 얻음이 있었다고 전한다.

 

당악문헌 충헌공유사에 보면 

"충헌공은 젊은시절 선대의 집에 불길한 조짐이 있어 이의신과 함께 산천을 두루 다녔는데 드디어 월출산 아래에서 길지 4~5곳을 얻었다. 귤정공으로부터 이하 모두 옮겨 안치하였다. 아마 충헌공은 이의신에게서 감여에 대한 얻음이 또한 많았다."

 

고산공의 4째 증조부가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행당공 윤복인데 이분의 셋째 사위가 이의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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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으로 바라본 묘소의 형상

 

두륜산을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병풍산과 태양산을 거쳐 금쇄동까지 마치 뱀이 또아리를 틀듯한 모양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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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아래에 위치한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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