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녹우당문화예술재단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 소개

 
세상·사람 그리고 자연을 노래한 시인
 

고산영정사진(2).jpg

 

고산 윤선도 (1587-1671 )
 
고산의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또는 해옹이다. 고산은 조선 중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 받는 시인이다. 당시의 문인들이 한문학의 틀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낸 작품을 이루어 냈다. 그의 시조에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사람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산은 강직하고 올곧은 정치인이었지만, 그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했고, 관직에 오르지 않았을 때는 해남과 완도 보길도를 중심으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유배지와 은거지의 자연은 시의 좋은 소재이자,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유배를 떠나며 지은 시에서는 끝까지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신하로서의 이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은거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현실 비판과 이상세계에 대한 꿈을 노래했다. 그리고 가어옹(속세를 벗어나 낚시질이나 하며 시와 술을 벗하며 강호에 묻혀 지내던 양반을 말한다)으로 복잡한 세상을 떠나 자연과 함께 하고자 했던 삶의 모습을 그의 시조에서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유학자로서 충(忠)과 효(孝), 백성을 위한 위민(爲民) 의식의 시를 짓고, 세상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우리말로 노래했던 위대한 시인이었다.
 
고산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 많은 삶으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과 시름과 흥, 원(願)을 시문(詩文)으로 풀어낸다. 
 
 
고산의 출생
 
고산은 본관이 해남으로 1587년(선조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현 서울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 자는 약이(約而)다. 고산은 해남종가에 아들이 없자 8세때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고산의 일생은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인해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보내게 된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곧은 성격을 지녀 부당함을 보면 자기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탄한 일생을 살지 못했다.
 
 
고산의 삶
 
고산은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지만 당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시기로 당시는 이이첨 등 북인들이 득세하여 남인이었던 고산은 이러한 세력다툼 속에서 힘을 펴지 못 하였으며 광해군에 아첨하는 권세가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때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비난한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 주변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 돼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지만 유배 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곳에서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에 젖는다.
 
고산은 42세가 되었을 때 출사의 꿈이 펼쳐진다. 별시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48세에 성산현감으로 좌천되고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다음해 현감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다시 귀향한다.
 
1636년(인조14) 고산의 나이 50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애국의 정이 깊었던 고산은 향리자제와 가졸 등 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선편으로 강화도까지 간다. 그러나 이미 왕자들은 붙잡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개탄 평생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한다. 이때 배를 타고 남하하다 도착한 곳이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완도의 보길도다. 그는 이곳에서 산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샘과 돌이 참으로 아름다워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라고 감탄하며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고산은 격자봉 아래에 은거지를 정하고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지었으며 낙서제를 세우고 자연에 묻혀 어부사시사를 짓는 등 작품생활을 하게 되며 임종시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땅이 된다. 고산의 시련은 말년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74세 때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기년복을 주장하는 서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의 논쟁에 있어 3년복이 옳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고산의 말에 과격함이 있다하여 송시열 등 반대파에 의해 사형이 주장된다.
 
그러나 고산은 바른말하는 선비요 또 선왕의 사부니 경솔히 죽일 수 없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된다. 고산은 79세(1665년 현종6)에 광양으로 이배 되고 81세에 유배에서 풀러날 때까지 7년 4개월의 긴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항년 85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한다.
 
고산은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의 생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시련과 극복' '득의와 풍류 '고난과 개척'으로 교차된 삶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산은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문학적으로 매우 뜻 깊은 시대를 살다간 시인이다.
 
그래서 그를 평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문학이다. 이러한 그가 평생을 통해 쏟아낸 엄청난 시구로 인해 한국의 국문학사는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윤선도는 그의 창작산실이 거의 유배, 은둔지였던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인 배경을 비롯 그 공간에서 처하게 된 동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고산이 택한 은거지는 크게 해남 현산면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였다. 금쇄동은 첩첩산중 육로를 거쳐 찾아야 할 산수자연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가야 할 해중자연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 된다. 해남에서 문학생활의 주무대는 현산면에 있는 금쇄동과 수정동, 문소동으로 이곳에서 약 10여년을 번갈아 머물며 「산중신곡, 「금쇄동기」등의 작품을 쏟아냈고 보길도의 부용동에서는 일곱 차례에 걸쳐 약 12년간을 「어부사시사」도 짓고 풍류하며 살았다.
 
 
진도 굴포리 동제
 
고산공의 간척에 대한 은혜를 기리는 동제를 매년 정월대보름에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고산공을 신위로 제를 지내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