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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녹우당문화예술재단

고산 년보

고산 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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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는 아들인 윤직미(尹直美)가 편한 것과 외손인 약봉 심상서(藥峯 沈尙書)가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

 

태어남 | 1587년 선조 20년 정해년 6월 22일 戊時

한성 동부 연화방(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예빈시부정인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안씨의 차남으로 탄생하심. 본관(本貫): 해남(海南) 자(字): 약이(約而) 휘(諱): 선도(善道) 호(號):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5세 | 1591년 선조 24년 신묘년
형모가 단중하고 기상이 장숙하여 보는 사람은 그 그릇됨이 보통 아님을 알았다

 

6세 |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입학하다. 총명이 보통사람보다 나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언어와 동작이 성인의 본보기가 되었다.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리강산이 왜구에 짓밟히고, 왕은 의주까지 몽진하게 돼,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명조 연합군과 왜적과의 기나긴 싸움이 장장 7년을 걸쳐 6년을 넘도록 이 나라 온 강토가 전쟁터가 되었다


8세 | 1594년 선조27년 갑오년
종가인 윤유기(작은아버지임)의 양자로(서울 명동) 들어가심. 작은아버지가 종가인 큰집으로 양자 갔다하여 백부가 아니며 고산은 양부(養父)를 아버지라 부름.


11세 | 1597년 선조30년 정유년
고산공은 산사에서 공부하다. 절에서 수륙회를 대설하자 모두 구경하되 공은 홀로 단좌하여 독서에 열중하다.


15세 | 1601년 선조34년 신축년
아버지인 관찰사공의 안변 도호부사 부임시 수행하고 돌아오심.

(14세 가을에서 15세) 이 때쯤 한문시 4수를 지었다.


17세 | 1603년 선조 36년 계묘년
남원윤씨 윤덕순(판서 윤돈의 따님)과 결혼, 진사 초시에 합격.


18세 | 1604년 선조37년 갑진년
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 되심.


20세 | 1606년 선조39년 병오년
승보시(陞補試)에 연달아 장원(1등)하고, 향해(鄕解)에도 합격하심. 이때 처음으로 소학(小學)에 접하고 평생의 필독서로 삼다.


21세 | 1607년 선조 40년 정미년
서울에 계심.

3월 15일 장남 인미(仁美)를 낳다. 아버지는 부평 도호부사됨.

한시문 2수를 지었다.


22세 | 1608년 선조 41년 무신년
서울에 계심.

2월 선조대왕 승하하시고 광해군이 뒤를 잇다.

4월 21일 어머니 능성구씨 세상 뜨심(향년 54세).

한문시 4수를 짓다.


23세 | 1609년 광해군 1년 기유년
서울에 계심,

8월 20일 선생을 낳으신 어머니 순흥안씨 세상 뜨심(향년 59세).


24세 | 1610년 광해군 2년 경술년
서울에 계심. 한문시 1수를 짓다.


25세 | 1611년 광해군 3년 신해년
서울에 계심,

10월 복결(탈상)하다.

11월 비로소 해남의 선대묘소를 성묘 차 내려가심.

내려가시며 곳곳의 경치를 7언고시 122구나 되는 남귀기행(南歸記行)과 상우부 등 12가지를 짓다.


26세 | 1612년 광해군 4년 임자년
봄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 하심. 임숙영이 공의 글을 보고 '당세 제일'이라 탄상하여 추천하므로 모설방고산(冒季訪孤山)이란 시가 유행되다.

9월 25일 차남 의미(義美》 낳다.

12월 28일 생부 부정공 세상 뜨심.(향년 62년).

한문시 8수 짓다


28세 | 1614년 광해군 6년 갑인년
한문시 7수 등을 짓다


29세 | 1615년 광해군 7년 을묘년
2월 탈상하다.

한문시 7수 등을 짓다


30세 | 1616년 광해군 8년 병진년
서울에 계심.

12월 21일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집권파의 전권난정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이첨 등의 죄를 상소하였으나 이 상소문은 집권파인 이이첨 등의 손에 쥐어진 채 임금에게는 전해지지도 못하고 이로 인하여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가게 됐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조야의 뜻있는 선비들이 놀랐다.


31세 | 1617년 광해군 9년  정사년
경원에 귀양 가심.

1월4일 종실의 귀천군 등 19인이 간신을 규탄하고 고산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모두 귀양 갔다.

1월 9일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지 결정되어 압송되고 관찰공도 연좌되어 관직이 삭탈되었다.

2월에 비로소 경원 유배지에 닿다.

한문시 43수 등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32세 | 1618년 광해군 10년 무오년
겨울에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되심.

이배되기 전 경원에서 한글 시 견회요 5수와 우후요 1수 등 9수를 짓다.


33세 | 1619년 광해군 11년 기미년
기장에 계심.

4월 28일 3남 예미(禮美를 낳다.

5월 13일 부친 관찰사공 세상 뜨심(향년 66세)


35세 | 1621년 광해군 13년 신유년
기장에 계심. 8월에 탈상하다 이 해에 납전해배(納錢解配)를 위해 서울에서 찾아온 동생 선양을 만났으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성품 때문에 시세를 따르지 않고 거절하였다. 이때에 동생과의 이별을 중별소제2수(囎別少弟二首)에 담았다.

한문시 8수를 짓다


36세 | 1622년 광해군 14년 임술년
기장에 계심.


37세 | 1623년 인조 1년 계해년
3월 12일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폐위됨.

13일에 인조 즉위하고 대사령이 내리다.

4월 의금부도사금오랑에 제수되어 서울에 돌아와 관찰공 묘에 성묘하다.

7월에 사직하고 해남에 내려가서 두문 독서함.

8월 별시초시에 합격하다.

한문시 5수 짓다


39세 | 1625년 인조 3년 을축년
해남에 계심,

1월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40세 | 1626년 인조 4년 병인년
해남에 계심.

6월 답이현풍필성서 씀.

11월 안기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음.


41세 | 1627년 인조 5년 정묘년
1월 금나라가 서울을 침범하므로(정묘호란) 인조임금은 강화도로 피난. 고산공께서도 급히 강화에 가셨으나 왕을 뵙지 못하고 돌아오심.

3월에 화의,

4월에 환도함.

10월 사포서 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그만 두다. 한문시 38수 등을 짓다.


42세 | 1628년 인조 6년 무진년
서울에 계심.

봄에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 급제함 시험관 이조판서 장유가 공의 책(策)을 보고 '동국제일책(東國第一策)'이라고 감탄하다.

3월 이조판서 장유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에 임명됨.


43세 | 1629년 인조7년
서울에 계심. 12월 공조좌랑에 오르고 명년까지 사부 겸임하도록 특별 임명됨. 한문시 6수 등을 짓다.


44세 | 1630년 인조 8년 경오년
서울에 계심.

장남 인미와 차남 의미가 사마시(司馬試)에 연달아 합격하자 임금이 주찬을 내리시다.

7월 병 때문에 공조좌랑을 그만둠.

10월 별시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12월 공조정랑에 특별히 임명되고 명년까지 사부를 겸하도록 임명됨.


45세 | 1631 인조 9년 신미년
서울에 계심.

3월 동호를 유람하니 내전에서 주찬을 내리다.

6월 호조 정랑 그만두고 해남으로 내려가심. 주찬을 내리다.

11월 형조 정랑에 임명되니 사양하고 총융랑도 그만두다.

12월 양주 노해(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관찰공의 묘를 해남 화원면으로 면례함.


46세 | 1632년 인조 10년 임신년
서울에 계심.

1월 호조 정랑에 특별 임명되고 사부를 겸하도록 임명.

2월 사복시첨정에 임명됨. 3월 한성서윤에 임명됨.

11월 병 때문에 한성 서윤과 대군사부를 그만두니 설산도(雪山圖) 두 폭과 명주 2필 등을 내리다.


47세 | 1633년 인조 11년 계유년
서울에 계심.

봄에 증광향해 별시에 장원 급제 하심.

4월 증광복시에 1등으로 뽑히다. 술과 꿩과 생선을 내리심. 예조정랑 임명.

5월 시강원 문학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소를 올려 그만둠.

7월 관서 경시관에 임명되다.

9월 시강원 문학에 임명되다.

10월 휴고(休告), 해남에 내려가 영분(榮墳: 조상의 산소에 찾아가 풍악을 잡히며 자신의 벼슬을 봉고함)하다.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다.

11월 상경도중 제상 강석기 등의 모함으로 인해 용인에 닿았을 때 벼슬을 버리심.

한문시 13수 등을 짓다.


48세 | 1634년 인조 12년 갑술년
성산에 계심.

봄 성산 현감으로 좌천되고 가족은 해남으로 이사하다.

8월 향교에서 석전(釋奠)을 행하다.


49세 | 1635년 인조 13년 을해년
성산에 계심.

2월 향교에서 석전을 행하다.

7월 양전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나 보고되지 않다.(量田不報疏)

11월 1일 사직 귀향하려 했으나 경상 감사 유백증이 고산공을 모략하여 파직되어 해남으로 내려오심,

한문 시 2수등을 짓다


50세 | 1636년 인조 14년 병자년
해남에 계심.

5월 차남 의미 죽다.

12월 병자호란 일어남.


51세 | 1637년 인조 15년
1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피난중인 원손대군과 빈궁을 구출하고자 백수(百數)의 의병을 배에 태우고 1월 29일 강화에 닿았으나 왕자 등은 이미 붙잡혀 간 뒤라 회선하던 중 선상에서 항복의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제주도로 가서 은거할 결심으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산수가 수려한 보길도를 발견 이곳 황원포에 내려 터를 닦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집을 지어 낙서재라 이름하여 이곳에서 은거하심.

격자봉을 비롯한 한문시 15수 등을 짓다.

1월 강화도 침략되고, 인조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 2월 청태종 돌아감.


52세 | 1638년 인조 16년
봄에 대동찰방과 사도시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일컬어 부임지 않음.

3월 15일 간원이 여러 차례 아뢰어 잡아들여 국문하고 죄 줄 것을 청하므로 드디어 영덕현으로 유배의 명이 나다. 이때에 장문의 공사를 올렸다.

6월 영덕배소에 닿았는데 단양을 지나오시면서 혈마공암(歇馬孔巖)이란 멋있는 한시를 지었다.

이 해에 4남 순미를 낳다.

한문시 20여수를 짓다.


53세 | 1639년 인조 17년 기묘년
2월 유배 풀림. 20일 아침 경주 요강원에 이르렀을 때 8세 된 서자가 이달 초하룻날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도미아(悼尾兒)와 견회(遣懷)라는 한시를 짓다. 해남에 내려가서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고, 현산면 구시리의 수정동에 인소정을 짓고 왕래 소요하시면서 가묘 대사가 아니면 집에 돌아가지 않으심.

한문시 10여수를 짓다.


54세 | 1640년 인조 18년 경진년
봄에 금쇄동과 문소동에서 금쇄동기를 짓다. 한문시 8수를 짓다. 금쇄동기 원문에는 “신사세모금쇄주인기(辛巳歲暮金鎖主人記)"로 되어 있음.


55세 | 1641년 인조 19년 신사년
금쇄동에 계심.

한문시 3수를 짓다.


56세 | 1642년 인조 20년 임오년
금쇄동에 계심,

산중신곡의 오우가등 한글 시, 19수를 짓다. 한문이란 밀림 속에서 시공을 훌쩍 뛰어 넘어 우리말의 예술어화와 문화적 가치를 최고로 발휘한 창작을 하심.

작품 25수 등을 짓다.


57세 | 1643년 인조 21년 계미년
금쇄동에 계심.

10월 5일 5남 직미(直美) 낳다.

한문시 3수를 짓다.


58세 | 1644년 인조 22년
2월 왕이 갑자기 건강이 나빠 고산 불러 의약(議藥)하려 했으나 공도 병 때문에 명을 받들지 못하고 현도(縣道)에 나아가 상소했으나 보고되지 않다.

작품 두편이 있다.


59세 | 1645년 인조 23년
금쇄동에 계심.

산중속신곡, 고금영 등 한글시와 한시 14편을 짓다.


60세 | 1646년 인조 23년 병술년
부용동에 계심.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백강 이경여에게 차이상경여시(次李相敬輿詩)짓고 한시 5수를 더 짓다.


61세 | 1647년 인조 25년 정해년
부용동에 계심.

큰사위 심광면(증 이조참판) 죽다.

한시 2수를 짓다.


62세 | 1648년 인조 26년 무자년
부용동에 계심.

한시 6수를 짓다.


63세 | 1649년 인조 27년
금쇄동에 계심.

븜 금쇄동에 계시며 선조(先祖)의 묘제식(墓祭式)을 정하고 많은 위토답을 장만하시고 추원당(追遠堂) 건립하심.

5월 8일 인조대왕 승하하시고

5월 13일 윤고산께서 가르치신 봉림대군이 17대 효종으로 등극하시니 현에 나아가 거에성복(舉哀成服)함.

9월 아들 인미를 시켜 상소를 봉하여 진언하다.

10월 사헌부에서 병자년에 분문하지 않았음과 아들을 보내 상소함을 들어 국문하여 죄를 정하자고 여러 번 아뢰였으나 효종이 따르지 않았다.

만박진사이후(挽朴進士而厚)를 짓다


64세 | 1649년 효종 1년 경인년
부용동에 계심. 한문시 수를 짓다


65세 | 1651년 효종 2년 신묘년
부용동에 계심.

가을 부용동에서 국문학에 영원히 빛나는 금자탑이며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어부사시사 4편 춘하추동 각 10수씩 40수를 지으셔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게 되다.

한시 6수를 더 짓다


66세 | 1652년 효종 3년 임진년
1월 18일 성균관 사예(정4품)에 임명하시며, 친서를 특별히 보내 올라오도록 당부함
3월 4일 18년 만에 상경 20년 만에 상봉하니 효종은 기뻐하며 주찬을 내림

3월27일 승정원 동부승지에 특별히 임명되니 면직을 구하는 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3일 효종께서 말하기를 “윤선도는 세상 사람들이 청탁하고 끌어주고 하는 꼴을 본받지 아니하고 시골에서 본분을 지켰다 " 고산공을 배척한 사람 중에서 정언 이만응의 직을 갈라 하였다.

4월 4일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므로 이날 윤허하였다. 이 때에 효종께서는 속히 취임하라 했으나 고산공을 배척하고 헐뜻는 사람이 있어 고산께서는 재소(再疏)후에 병으로 양주 고산 별서에 계셨다.

4월과 7윌 효종께서 궁중의 관원을 보내어 문안하며 주찬과 절선·유석(酒饌·節扇·油席)을 3회나 내려 위로하였다,
5월 10일 몽천요 3수를 지으심.

8월 11일 예조참의에 특별히 임명되고 병때문에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성밖에 나와서 소를 올려 면직해주기를 청함
9월 4일 은장식한 갓. 붉은 매듭, 공작털과 학털' 활, 화살, 환도를 내림.

10월 22일 시무8조소(時務八條疏)틀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빌었으나, 효종께서는 "매우 감탄한다."며 두터운 비답을 내려 장려하고 오히려 옆에서 충고 보좌토록 하심. 고산께서도 나가지 않고 반대파의 모함이 심하므로 부득이 귀향을 허락하시게 되어 양주 고산촌에 머무심
11월 7일 원두표를 내쫓고 왕권을 확립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니 상 왈 "사연이 매우 해괴하니 본직을 갈라" 명하심. 이 상소로 또 온 조정이 들끓어 고산공을 삭출하기로 결정되니 상 왈 "내가 윤선도에게 죄 준 것은 본의가 아니다."고 하고 좌의정 김육은 이 일을 미안하게 여긴다고 아뢰는 등 14일에야 잠잠해졌다.

해남으로 내려오심.

인평대군이 방문하여 시를 지어주는 등 한시 20여수를 짓다


67세 | 1653년 효종 4년 계사년
부용동에 계심.

2월 금쇄동에서 부용동으로 들어가 세연정을 증축하고. 석실 구축, 회수당·무민당·정성당 등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침.

한시 7수 짓다


68세 | 1654년 효종5년 갑오년
부용동에 계심. 

한문 작품 1절을 짓다.


69세 | 1655년 효종 6년 을미년
금쇄동에 계심. 

2월 22일 금쇄동에 계실 때 부인 남원윤씨 세상 뜨심. 군직(軍職)에 임명됨.

10월 "시폐사조소" 를 올리다.

만부인 등 2수를 짓다.


70세 | 1656년 효종 7년 병신년
금쇄동에 계심.

3월 응지소(應旨疏)를 올리다. 손자 r이구」 죽다.

만손이구(挽孫爾久)와 향사당 조약(鄕社堂條約)을 짓다.


71세 | 1657년 효종 8년 정유년
2월 금쇄동에서 부용동으로 들어가심.

9월 효종의 소명을 받고 상경(중궁의 의약(議藥) 때문). 쌀, 콩, 소금, 미역을 내림.
11월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두 번씩 소를 올려 물러갈 것을 구했으나 불허함.

12월 감귤을 내리시고 또 술과 돼지고기, 사슴고기, 꿩, 감귤, 유자를 내리시다.

한시 1수를 짓다.


72세 | 1658년 효종 9년 무술년
3월 15일 공조참의에 특별히 임명함
4월 3일 고산께서 상소하여 새 관직을 삭제하여 마음 편히 살도록 해달라고 하니, 여론에 구애받지 말고 속히 출사하라 하였다.
4월6일 고산께서 상소하여 정개청 손자의 상소가 퇴각당한 것과 정개청 서원 철폐의 부당함을 소진하고 도잠의 귀거래사를 인용 물러 갈 것을 원하는 장문의 소를 을리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4월 16일 날마다 고산공을 배척하여 헐뜯고 트집 잡으며 파직할 것을 아뢰있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헌부가 극력으로 쟁변하니, 상 왈 “이 사람은 아첨을 해서 뜻을 이루는 자가 아니다." 하였다. 3소, 4소를 올리고, 고산에 와 머물다.


72세 | 1658년 효종 9년 무술년
7월 25일 도승지 김좌명에게 잘 무마하도록 상이 당부하였다
8월 12일 헌부가 아뢰기를 윤선도는 노망이 아니니 따져보고 관직을 삭탈하여 고향으로 보내자고 물고 늘어지므로 상이 파직하라 윤허하였다. 상이 사부인 고산선생을 멀리 해남에 계시면 왕의 과실을 충고 보좌하기 어렵다 하여 화성(수원)에 집을 지어주시고 여기서 살도록 하였다.

12월 진사 정유악의 대학문목(大學問目)에 답하다. 만인평대근(挽麟坪大君) 등 한시 4수를 짓다.


73세 | 1659년효종 10년 기해년
고산에 계심. 

1월 정유악의 편지에 답하다(격물물격설을 짓다.)

2월 판서 정세규에게 편지를 보내고, 정유악의 경의별곡(敬義別幅)에 답함.
4월 정유악의 학용문목(學庸問目)에 답하다.

5월 4일 효종이 31세에 등극 후 10년간 재임하고 이날 41세로 승하하심.

5월 9일 현종이 위에 오르시니 궐하에 나아가 곡하고 성복 후 고산에 돌아옴.
5월 16일 첨지에 임명되고, 25일 간산의 명을 받다.

6월 15일 산 자리를 평가하고 그림을 그려서 올리다.

6월 산릉의 공사가 진행증인데 송시열과 준길 일파의 반대로 수원 산릉이 나쁘다고 하여 건원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달을 넘기면서 논란이 일어 고산공을 배척하여 헐뜯고 결국에 수원은 중지되고 건원릉으로 재결정되었다.
7월 총호사 심지원에게 편지 보냄.
10월 29일 효종의 재궁은 건원릉에 안장되다. 오늘날의 여주로 옮긴 것은 다음 해부터 능이 변괴가 일어나 결국에 15년 후인 현종14년 10월 7일 여주의 홍제동으로 이장한 것이다.

정유악에게 답하고 작품 4수를 짓다.


74세 | 1660년 현종 1년 경자년
2월 현종의 건강상 의약(議藥)차 입궐하명을 받음 오래있지않고 병 때문에 고산으로 돌아오심.
4월 18일 예를 논하고 산릉, 상복, 왕권에 관하여 소를 올리니 관직이 삭탈됨.
4월 24일 고산께서 소를 올린 다음부터 날마다 현부와 간원이 고산을 배척하고 매도하여 죽이기를 원하므로, 우윤 권시가 상소하여 "선도의 상소를 보았는데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으니 역시 과감히 말하는 선비 입니다 선왕의 사부였으니 가벼이 죽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상이 좋은 뜻으로 답함. 부제학 유계가 청하여 공의 상소를 불태웠다. 다음날 권시의 상소로 공론이 떠들썩하므로 권시가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4월 27일 유배지로 출발되고, 30일 유배지를 삼수로 결정하였다.
5월 27일 대비 전에서 표리(表裡: 임금이 은혜로써 하사한 옷의 겉감과 안감)를 내리다.
6월 3일 중궁전(中宮殿)에서 표리를 내리고, 6월7일 대왕대비전에서 표리를 내리다. 공께서 배소 삼수에 닿다. 겨울에 예설 두 편을 더 지어 뜻을 굽히지 않으심.

상례 이필행의 묘갈명과 필선 정뇌경의 신도비명을 짓고 한시 10여수 더 지음.


75세 | 1661년 현종 2년 신축년
삼수에 계심.

1월 서회문(敍懷文)을 짓다.
4월 10일 다른 고을로 옮겨 안치토록 하고, 17일에 북청으로 이배의 명이 나다.
4월 21일 행 부사직 조경이 상소하여 고산공의 무죄함과 분소의 잘못을 들어 고산공을 적극 옹호하다가 23일 파직당하다.

5월 15일 북청으로 이배토록 명을 내렸다가 논란이 일어나 그 명을 환수함.
5월 26일 송시열이 고산공과 조경을 논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다.
6월 13일 위리안치로 명하다.

자손을 훈계하는 글을 쓰고 한시 6수를 더짓다.


76세 | 1662년 현종 3년 임인년
삼수 계심.

3월 28일 영 중추부사 이경석의 건의로 위리를 철거하다. 읍내에서 선화원(旋化原)으로 옮기다.
4월 3일 우참찬 민응형이 85세인 고산공을 옹호하며 사면을 건의하다.
9월 11일 헌부가 위리 철거한 명을 환수토록 청한 계사를 중지하였다.

한시 3수를 짓다.


77세 | 1663년 현종 4년 계묘년
삼수에 계심. 4월 19일 수찬 홍우원이 상소하여 "선도는 본디 기개와 절개가 있어 과감히 말하는 선비입니다. 속히 석방해주라"고 옹호하는 소를 올렸는데, 양사에서 또 들고 일어나 홍우원을 삭출토록 여러 차례 고하였으나 파직만 했다.
7월 29일 양사(사간원, 사헌부)가 홍우원 삭출 논의를 정지하다.

만한첨지(挽韓僉知)와 계묘세모유감(癸卯歲暮有感)을 짓다.


78세 | 1664년 현종 5년 갑진년
삼수에 계심.

7월 16일 조수익이 고산공과 조경을 신구하다가 서인의 탄핵으로 여주에 내려가 은거하고 직명이 내려도 나오지 않았는데 예조 참판으로 임명되다.
8월 5일 장령에 올라가서 백두산을 바라보고 돌아오시며 등장령망백두환...(登長嶺望白頭還)이란 시를 짓고 또 다른 작품 4수를 짓다.
9일 용주 조경에게 답서함.


79세 | 1665년 현종 6년 을사년
2월 21일 유학 섬대경이 고산공을 석방해야 된다 상소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함.
2월 25일 이배 장소를 놓고 논란이 일다가, 27일 광양으로 결정하였다.

3월 삼수에서 출발하여 광양으로 옮기는데. 함경도 수령 중에 노비 40여명과 말 20여필을 제공하고 또 가마꾼들을 각 접경 지역에 대기시켜 두고 기다리도록 연로(沿路)에 통지를 하여, 그 당시 각 고을 수령들이 고산공을 대접하기를 봉명 사신의 행차를 모시는 듯 하였다.
6월 광양 배소에 이르다.

6월 21일 사간 김만기 등이 고하여 지난 3월 이배할 때 각 고을 수령들이 법을 어기고 지나치게 대접했다 하여 처벌을 구하므로 속전(벌과금)을 받도록 했다.


80세 | 1666년 현종 7년 병오년
광양에 계심.

3월 8일 대사간 정만화 등이 고하여 지난해에 이배 당시 각 고을 수령들이 윤고산에게 지나친 대접을 했다하여 속전을 받았는데, 이날 파직을 구하므로 모두 파직을 허락하였다.
3월 23일 경상도 유생 유세철 등 천 여명이 상소하여 양송의 예론을 반박하였다.
7월 금산군 성윤의 신도비명을 짓다. 판관(判官) 조실구(曺實久)의 묘갈명과 봉사 백홍제(奉事 白弘悌)의 묘갈명을 짓다. 겸제 하홍도를 만하다.


81세 | 1667년 현종 8년 정미년
4월 17일 죄인들을 심리하면서 거론되어 의논이 뿐하였는데 상이 석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결정을 못 내렸다.

5월 11일 유학 이석복이 상소하여 고산공의 석방을 아뢰면서 “지금 가뭄이 계속되어 길에서 서로 조문하여 말하기를 '선도가 석방되지 않았는데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며 들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기를 '선도가 석방되어야 하늘이 비를 내릴 터인데', 하고 있습니다. 비 내리는 것이 반드시 선도의 석방 여부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정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라고 상소 하였다.

7월 21일 상이 희정당에서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뒤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석방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에게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석방하되 그 내용을 나이가 많아 석방한다는 뜻으로 알라." 하였다.
8월 해남에 계시고

9월 부용동으로 들어 가셨다. 4남 순미가 세상을 뜸.


82세 | 1668년 현종 9년 무신년
부용동에 계심.

기실(記實)과 견회(遣懷)를짓다


83세 | 1669년 현종 10년 기유년
부용동에 계심.

8월 3남 예미가 세상 뜸.

한시 동하각(同何閣)을 짓다.


84세 | 1670년 현종 11년 경술년
부용동에 계심 일가 중의 가난하고 어려운 이의 비용을 위하여 의곡(義穀)을 설치함.


84세 | 1671년 현종 12년 신해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영욕과 파란만장했던 세월의 한 세대를 85세로 하세(下世)하시다.
9월 22일 생존시 이미 정하신 해남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산성 아래 문소동 옛터에 안장되다. 정부인(貞夫人)남원 윤씨도 함께 부장(祔葬:합장)하다.
12월 윤고산께 직첩을 도로 주게 하였다.<왕조실록 :命還給尹善道職牒: 현종행장> 고산유고의 연보에는 임자년으로 되어 있음.


1673년 현종 14년 계축년 10월 7일
효종의 능을 양주에서 여주의 홍제동으로 이장되었다.


1674년 현종 15년 갑인년
2월 24일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여, 6월 4일 영릉에 장사지냈다. 복제문제로 2차 예송이 일어남.
8월 4일 고산공의 손자 윤이후가 조부인 윤고산께서 경자년에 올렸다가 정원에서 불태워버린 상소 및 예설 2편을 써서 올렸으나 기각당함.

8월 18일 현종이 승하하고,

8월 23일 숙종이 14세의 나이로 즉위함.
12월 13일 현종을 구리시 숭릉에 장사지냈다.


1675년 숙종 1년 을묘년
2월 7일 숙종이 윤고산께 의정(議政)을 추증(追贈)하라 하였는데. 이튿날 허적(許積)이 의정은 지나치다 하여 정경(正卿)으로 고쳐 명함.
2월 특증이조판서(特贈吏曺判書)

5월 2일 윤휴가 아뢰어 고산공의 아들 인미에게 추증하도록 하였다.


1676년 숙종 2년 병진년
2월 28일 이조참판 이무(李袤)가 고산공께 삼공(三公)증직을 청함.
3월 5일 숙종이 고산공의 상소를 불태우기를 청한 사람과 안율(按律)을 정한 대관(臺官)을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므로 정원(政院)에서 조사하여 아뢰었다.


1678년 숙종 4년 무오년
8월 2일 고산공의 손자 선공감역 윤이석이 효종의 어찰 5폭과 예설 2편을 진상하면서 소진(疏陳)하였는데 숙종이 감격하고 가상히 여겨 특별히 6품으로 올려 이산현감에 임명되었다
9월 28일 허 적이 아뢰어 고산꼐 정2품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니 특명으로 중시충헌(特命贈諡忠憲)이 내려지고 남파 홍우원이 시장을 지었다(危身奉上曰忠博文多能日憲)


1680년 숙종 6년 경신년
8월10일 송시열 일파가 상소하여 고산공의 관작과 시호의 추탈여부를 상소. 봄에 고산공의 관작과 시호가 삭탈됨. 손자 생원(生員) 윤이후의 요청으로 미수 허목이 고산공의 신도비명을 짓고,

1718년 현손(윤덕희)이 신도비를 세움


1689년 숙종 15년 기사년
2월 13일 우이정 김덕원이 고산공과 아드님 인미의 환수된 관작 시호를 다시 주자고 청하여 허락하였다


1690년 숙종 16년 경오년
호남 유생 유이성 등 160여명의 상소로 서원건립 명이 나다.

 
 
번역 : 윤주현 박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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