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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녹우당문화예술재단

공재 윤두서

공재 윤두서 소개

 
시대를 한발 앞서간 문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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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1668-1715)
 
고산 윤선도와 함께 녹우당 해남윤씨의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공재 윤두서(1668~1715)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불렸던 문인화가로 그가 그린 대표작 「자화상」은 국보 세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재는 숙종 19년(1693)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서인이 세력을 잡고 있던 시절이어서 벼슬을 한다거나 정치적 출세와는 거리가 멸었다. 윤두서가 살던 시기는 숙종 재위기간으로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동을 거치면서 기존의 권위들이 무너지고 변화와 개혁에 대한 각성과 모색이 싹트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활동했던 윤두서의 그림에는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들이 나타난다.
 
·공재의 작품세계
 
윤두서는 조선 중기까지 우리 그림에 등장하는 신선이나 도사의 옷차림, 시중드는 동자의 머리모양 등 중국의 의습을 그대로 따라 그리던 화풍에서 벗어나 「나물 캐는 여인』, 『경전목우도」 등 기존의 산수화풍을 벗어나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전개한다.
 
그의 그림에서 「짚신삼기」는 휘늘어진 나무 밑에 도사가 아닌 맨상투 바람의 조선남자가 다리를 뻗고 앉아 열심히 짚을 엮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풍속화는 18세기 중. 후반에 김홍도 등에 의해 유행하게 되는 풍속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산수와의 관념적 화풍 속에서 민중들의 생활상을 현실에서 끌어넣을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윤두서는 조선후기 사실주의 회화를 이끈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실학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윤두서는 「동국여지지도」와 같은 지도나 기하학을 비롯 다양한 분야에 박학했던 학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박학의 학문경향은 고산 윤선도를 비롯한 해남윤씨가 인물들의 경향이기도 하다.
 
윤두서는 옥동 이서 등 출세에서 소외된 남인학자들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틀에 박힌 관념을 벗어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답하고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윤두서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와 절친하였는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윤두서의 제문을 쓰면서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여 성호 이익과 같은 실학자가 나오는 데는 윤두서의 선구자적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윤두서의 실학은 실학을 추구했던 당시 남인들과의 교유와 함께 윤두서의 외증손 다산 정약용에도 미치게 된다. 정약용은 외가인 이곳 녹우당과이 교류를 통해 그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정약용의 제자 중 절반이 해남윤씨로 그의 학문을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윤두서는 사람이나 동물을 그릴 때는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때까지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림을 그린 후에 대상의 본 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버렸다고 한다. 윤두서의 사실주의적 기법은 자화상에 잘 나타난다. 자화상은 그림이 양식에서도 전무후무한 묘사의 기법을 쓰고 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은 그의 내면을 잘 담고 있다.
 
윤두서는 또한 말을 즐겨 그리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중에 「백마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말 그림이 현존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자화상과 함께 한국 회회사상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되는 「노승도」 그리고 「심득경 초상화」가 있다. 심득경은 윤선도의 외증손이며 윤두서와 절친한 지기로 지냈으나 먼저 죽었다.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려서 보내니 다시 살아온 것 같아 모두 울었다고 한다.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46세 때 (1713년) 서울 생활을 버리고 해남으로 돌아왔고 2년 후 48세를 일기로 녹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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